6. 중심은 무너졌지만 항로는 남았다
660년, 백제는 멸망했다.
백제 멸망은 한국 고대사에서 하나의 분명한 단절로 기억된다.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했고,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국가는 사라졌다. 왕은 포로가 되었고 귀족들은 흩어졌다.
기록의 관점에서 보면 여기서 이야기는 끝난다.
그러나 네트워크의 관점에서 보면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된다.
해양 네트워크 국가는 중심이 무너지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 네트워크는 다른 거점으로 이동한다.
백제의 경우 그 이동은 매우 분명하게 나타난다.
일본으로 이동한 백제의 기억
백제 멸망 직후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왕족, 귀족, 학자, 장인, 승려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이동은 단순한 망명이 아니었다.
이미 존재하던 네트워크 위에서 이루어진 재배치였다.
그 흔적은 일본의 기록 속에서 확인된다.
일본서기에는 백제 출신 인물들의 활동이 대량으로 등장한다.
그들은 일본 조정의 관료가 되었고, 불교와 문자, 기술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이 시기 일본 정치 중심지였던
야마토와 아스카 정권에는 백제계 인물들이 상당수 참여하고 있었다.
일본 고대 문화의 핵심 요소들이 이 시기 급격히 발전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불교 사원 건축 / 금속 기술 / 문자 행정 체계
이 모든 것은 단절된 창조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네트워크의 지식이 다른 거점으로 이동한 결과였다.
이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일본 고대 국가 형성 과정에서 백제계 기술자와 지식인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게 평가한다.
백제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네트워크의 중심 일부가 일본으로 이동한 것이다.
일본이 해양 국가가 된 이유
그러나 일본이 처음부터 해양 국가였던 것은 아니다.
일본 열도는 매우 넓다.
규슈에서 시작된 정치 중심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동쪽으로 이동했고, 일본 내부를 통합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일본 정치 구조는 점차 내륙 지향적이 된다.
중세에 등장하는 정이대장군이라는 직함은 그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 직함의 본래 의미는 “동쪽을 정벌하는 장군”이었다.
즉 일본 정치 구조의 중심은 바다가 아니라 내륙 확장에 있었다.
전국 시대 역시 일본 섬 내부의 영토 통합 전쟁이었다.
해양 네트워크는 일본 정치의 중심이 아니라 변두리의 활동 영역으로 남게 된다.
그 결과 등장한 것이 왜구다.
왜구, 동아시아의 해적 네트워크
중세 동아시아에는 또 다른 해양 네트워크가 등장한다.
그 이름이 바로 왜구다.
왜구는 단순한 일본 해적 집단이 아니었다.
그 구성에는 일본인뿐 아니라 한반도, 중국 남부의 해상 세력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 현상이 나타난 배경에는 하나의 정책이 있었다.
해금 정책이다.
명나라가 민간 해상 교역을 금지하면서 공식적인 교역 네트워크가 붕괴했고 그 결과 바다의 교역은 불법 네트워크 형태로 재편되었다.
유럽 역사에서 북아프리카 해적들이 지중해 교역을 장악했던 것과 비슷한 현상이 동아시아에서도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보여준다.
바다는 사라지지 않는다.
국가가 통제하지 못하면 다른 형태의 네트워크가 그 공간을 차지한다.
네트워크의 일부는 한반도에도 남았다
백제 멸망 이후 네트워크의 일부는 일본으로 이동했지만, 모든 것이 이동한 것은 아니었다.
한반도에도 그 흔적이 남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장보고다.
9세기 신라 시대에 등장한 장보고는 서해 해상 교역을 장악한 인물이었다.
그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중국, 한반도, 일본을 연결하는 거대한 해상 네트워크를 운영했다.
이 구조는 낯설지 않다.
강 하구 해안 거점 그리고 바다를 통한 연결 백제가 사용했던 구조와 매우 유사하다.
끝이 아니라 이동
역사를 영토 국가의 관점으로 보면 백제는 660년에 끝난 국가다.
그러나 네트워크의 관점으로 보면 660년은 단절이 아니라 재편의 순간이다.
중심은 무너졌지만 항로는 남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이동했고 기술은 다른 거점으로 전달되었으며 바다는 여전히 연결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이 네트워크는 또 한 번 다른 형태로 이어진다.
다음 편에서는 한반도 서해 해양 세력이 어떻게 고려 건국으로 이어지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왕건은 내륙의 군주가 아니라 바다에서 올라온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