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디에서 말하는가?

● 신앙을 타인을 향한 설득이나 정죄의 도구로 삼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 앞에 선 단독자로서 자신의 좌표를 기록하는 데 집중한다.

● 인간이 마주하는 절망은 정죄받아야 할 죄가 아니라 실존적 조건이며, 참된 신앙은 그 절망을 운명으로 받아들여 주저앉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 하나님의 은혜가 비록 인간의 기대와 달리 실패나 붕괴의 모습으로 찾아올지라도, 그것이 신의 완전한 주권임을 인정하고 무릎 꿇는 태도를 견지한다.

● 복음은 인간의 행위나 응답을 요구하는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압도적인 사건이자 선언임을 분명히 한다.

● 모든 사유의 출발점은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며 어떻게 오셨는가’라는 복음의 원형적 부르심에 있다.


– 확신을 남기지 않고, 좌표를 남긴다

나는 이 글을 설득하기 위해 쓰지 않는다.

누군가를 바꾸거나, 판단하거나, 올바른 결론으로 데려가기 위해서도 아니다.

다만 내가 어디에 서서 말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남기기 위해 쓴다.

나는 오래전부터 한 가지를 경계해 왔다.

신앙이 설명이 아니라 요구가 되는 순간, 복음이 기쁜 소식이 아니라 내가 지켜서 쟁취해야할 ‘구원의 조건’이 되는 순간이다.

그래서 이 블로그의 모든 글은 다음 세 문장을 좌표로 삼는다.


절망은 죄가 아니라 조건이다.

죄는 절망에 주저앉아 있는 것이다.

인간은 좌절하고, 무너지고, 방향을 잃는다.

그 자체가 죄라고 말하는 신앙은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절망 그 자체가 아니라, 절망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다.

절망 가운데 하나님을 찾지 않고, 운명론적인 패배론에 주저앉아 있는 것은 인간의 약함이요, 그것이 문제이다.

내 블로그의 글들과 사상은, 언제나 인간을 정죄하고, 바르게 살라는 교훈보다는,

인간이 놓인 조건을 먼저 바라보는 자리에서 시작하려고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내가 원하는 형태로만 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은 분명하다.

나는 하나님을 내 기대에 맞게 설명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은혜는 종종 내가 상상한 방식,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오지 않고, 때로는 내 입장에서는 실패와 붕괴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만은 흔들리지 않는다.

이 게시판의 글들은 ‘내가 하나님을 통제하려는 신앙’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주권 앞에 무릎 꿇고 엎드리는 신앙’의 자리에서 쓰인다.


복음은 ‘네가 똑바로 해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셨다’에서 시작한다.

복음은 요구가 아니다. 계획도 아니고, 조건도 아니다.

복음은 사건이다.

복음은 인간의 응답을 요구하기 전에, 하나님의 도착을 먼저 선언한다

마가복음의 1장의 시작처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다.

창세기 3장 9절의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가 구원의 시작이다.

이 블로그의 모든 글은 그 선언 이후에만 말을 시작한다.

[Log Closed]